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리뷰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에 강동원,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개봉했었던 걸로 안다. 상대적으로 이 영화가 묻혔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난 당시 이 영화를 선택했었다. 그 후에 우행시를 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김해곤이라는 사람이 영화의 감독이다. 그는 전에 파이란의 각본을 쓰기도 했었고, 그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도 했었다. 다른 영화에도 간간이 그런 식으로 출연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숙명’이라고 송승헌 주연의 느와르 영화도 한편 연출했었다.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인 것 같다. 나에겐 그런 느낌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있다. 그중에 최고는 이 영화였다. 물론 누군가 보기에는 술집 여자의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김승우는 데뷔 초기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배우였다. 데뷔 초기 작품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하긴 그러고 보면 그는 영화건, 드라마건 배우로서 자신의 에너지를 진하게 뿜어낸 작품이 없는 것 같다.
오프닝 시퀀스가 기억난다.
영업을 끝내고 가게 문을 닫으려하는 영훈(김승우), 일이 끝나고 한잔을 걸치러 온 근처 단란주점의 호스티스 아가씨들. 영업이 끝났다며 돌려보내려 하지만 여자들은 금방 마시고 갈 거라며 일단 앉고 본다.
“아저씨, 일로 와 봐요.”
연아(장진영)가 영훈에게 유혹의 손길을 처음 뻗치는 순간이다.
“아저씨 나 알죠?”
“알죠, 여기 로즈 식구들이잖아요.”
영훈의 그 말에 반색하는 아가씨들. 그때 연아가 본격적으로 꼬리를 친다.
“나 아저씨 꼬시러 왔어.”
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된다. 하지만 이미 비극을 깔고 가는 연애다. 왜냐? 영훈에게는 이미 자신이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순진한 애 꼬드겨서 어떻게 한번 잤는데 알고 보니 남자라고는 영훈이 처음이었던. 그래서 결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김해곤의 영화가 몇 편 되지는 않지만 흥행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것 아닐까? 분명 글은 잘 쓴다. 사람들 사는 냄새 풀풀 나게, 투자자들의 옛날 기억을 솔솔 떠올리게 하면서 지갑을 열게 하는, 그는 그런 글 솜씨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극히 촌스러운 설정에 요즘에는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를 잘 쓰는 미완의 재주다. 미완이라기보다는 철 지난 재주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지만. 글이나 영화를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 보고 즐기기에 나쁘지는 않지만, 가끔 한번 글이나 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기분 전환을 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할까?
하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없이 가볍다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숨겨진 걸작 멜로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훈과 연아, 이 두 명의 주인공 옆에는 친구들이 많다. 영훈의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나이값 못하는 애어른이고, 연아의 주변에는 직업적인 특성상 술집 아가씨들이다. 이들은 묘하게,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쪽수가 맞다고 쌍쌍이 짝을 지어 놀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논다.
그들은 틈만 나면 어울린다. 일 끝났다고 영훈의 고깃집에 모이기도 하고, 친구 중 누군가의 생일이라며 연아가 일하는 주점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때로는 이른 아침까지 술을 마시다가 취김에 화를 못 참고 대판 싸우기도 하고, 친구가 운영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테이프들을 막 집어던지며 초딩 들처럼 놀기도 한다.
언제까지 초딩 마인드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영화는 그렇게 계속 갈 것 같지만, 처음에 말했듯 태생적으로 비극을 깔고 가는 연애이기 때문에 영화는 조금씩 희극을 끝내고 비극으로 접어든다.
물론 예상은 됐지만 자발적인 비극은 아니다. 영훈은 여자 앞에서는 지극히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엄마는 아파트라도 당장 하나 장만해줄 테니까 어서 장가가라고 ‘쪼아 댄다’
어쩌면 그 둘은 그렇게 몇 년은 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 연애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건만 없었다면.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터진다. 이러저러한 일로 로즈의 상무(김상호분)에게 개 맞듯이 맞으며 엄청나게 굴욕적이며 쪽팔린 상황에 처해있는 영훈을, 소식을 듣고 구하러 온 연아의 서슬 퍼런 모습을 영훈의 엄마가 목격하고 만 것. 영훈은 그렇게 아니라고 잡아떼던 연아와의 관계를 그렇게 포기 아닌 포기로 끝내고 공식 여자 친구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영훈은 그렇게 결혼을 했으면 가정에만 관심을 쏟고, 연아는 아예 영훈에 대한 마음을 접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연아가 분명히 이야기한다. 이상하게 그게 잘 안된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그런 것 같다는 거다. 이상하게 생각한대로 잘 안 되는 것.
연아가 그렇게 영훈에게 매달리다가 영화 막판에 영훈이 찾아왔을 때 바람에 휘날리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나름 조신해보이려 하는 이유는?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그때가 연아의 마음이 영훈에게서 완전히 떠나서, 그가 남이라 느껴졌기에 한 행동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분명 영훈이 서글프게 우는 장면까지는 나왔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하지는 않고 영화는 끝났으니까.
난 이 영화를 열 번은 아니고 대여섯 번은 본 것 같다. 상당히 좋아하는 작품이고 좋아하는 정서다. 사랑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조금도 꾸미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낸 점이 좋았다고 할까. 적나라하다는 건 직업적인 설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한심하게 산다는 이유로 술 마시다 싸울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서러운 마음에 욕실에서 울다가 괜히 이유도 없이 ‘빨아줘’라고 할 수도 있다. 와이프한테 술 먹고 전화했다고 개 패듯이 때릴 수도, 반대로 개 맞듯이 맞을 수도 있고, 시장 갔다가 사온 옷 한 벌 때문에 티격태격 할 수도 있다. 몇 년 정도 사귀는 리얼한 연애는 보통 다 그렇지 않나? 난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긴 하지만.
앞서 얘기한 오프닝 시퀀스의, 연아가 영훈의 가게로 찾아가기 직전,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골목의 운치 있는 분위기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김해곤 감독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